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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_문화생활

천 개의 목격자 - 황민구

by 그것_ 2024. 11. 27.

요즘에 나는

 

 최근 내 전공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좋지 못한 시장과 상황, 그리고 주변에 '진짜'들을 보면서 차근차근 자신감을 잃어갔다. 스스로는 호기심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전공에 한해서는 호기심이 없다. 무언갈 하고자 하는 욕구가 계속 떠오르지 않았고, 여러 발표를 들어도 수긍을 할 뿐 별다른 의문점이 떠오르진 않았다. 이것을 단순히 실력 문제로 보기엔, 일하는 모습을 봐서는 성격인가 싶기도 하다. 후에 들어온 인턴 분이 나와 팀이 만든 제품을 보고 너무 기획 친화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 두번째 의문이 생긴다. 이 성격이 과연 이 전공과 맞는 것일까?

 

 예전에는 이 전공을 단순히, 내가 평생 좋아하지 못할 것이기에 선택했다. 좋아하는 일을 택하고 그것을 애증으로 보내버리는 것보다, 적성에는 얼추 맞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두는 것이 더 좋아보였다. 그러나 이제쯤 지친 거 같다. 기후위기, 수많은 사회 문제를 앞두고 이 일은 어떤 효용이 있을 지 의문만이 남았다. 쉬는 김에 새로운 일을 탐색하고 싶었다. 그러다 법영상 분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되묻는다. 그앓이인가? 글쎄, 본방은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이야기를 좋아해 매번 그알 유튜브를 들락날락 거린다. 요즘은 즐겨보는 것이 ⌜월간 황민구⌟와 ⌜영상분석보구서⌟이다. ⌜구해줘 민구⌟는 이미 다 봐서 라인업에 넣지 않았다. 황민구 전문가(이하 분석가라 하겠다)의 입담이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되었다.

 

 법영상 분석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억울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고, 내 전공과도 사소하게나마 접점이 있었다. 작은 화면에서 보는 분석가는 사회의 많은 부분을 채웠다. 세월호, 백남기 농민 사건, 작고 크게 지나가는 수많은 사건들. 내 방향성을 되짚어봤다. 평생 좋아하지 못할 일이라면,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얄량한 만족감이라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무턱대고 들어가는 것은 이 직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탐색부터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분석가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강연 소식을 알게 되었다. 가서 질문이라도 해보기 위해 그가 낸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천 개의 목격자⌟ 이다.

 

⌜천 개의 목격자⌟ 표지

 

 

 

 

 

 

보면서 나는

 

 재밌었다. 여전한 입담이다. 수많은 사례가 있었다. 300쪽이 간신히 넘는 이 책에 총 48 챕터가 들어가있다. 이 안에서 사람들은 화내고, 울더라. 이 사람에는 분석가 본인도 있었고, 어쩌면 나도 있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여럿 떠올라 머릿속이 혼잡하다. 차례대로 정리해보겠다.

 

No.007 밑장을 빼면 영상이 다르다 / No.010 어쩌다 명품 가방 진별사

 

 법영상으로 이것까지 할 수 있다고? 라는 생각이 든 에피소드였다. 둘 다 그알 유튜브에 영상이 별도로 있는 걸로 아는데, 뭐랄까, 굉장히 생각 외의 영역이라 놀랐다. 보통 영상 분석을 한다면 교통사고, CCTV 영상 분석(물론 7번 에피소드도 CCTV 영상이었지만) 위주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친구들에게 7챕터를 보고 단순 도박하면 도박죄이지만 사기 피해를 입으면 사기 피해자로 전환되어 무죄를 받을 수 있다고, 알아 놓으라고 얘기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딴 게 꿀팁?" "또 뭐 이상한 거 보고 오는 거냐" "도박하려고?" 라는 답이 돌아왔다. 불신을 기반으로 한, 참으로 든든한 친구들이다.

 

No.016 크리스마스 선물

 

 화가 많이 난 에피소드였다. 의뢰인 분은 지금 잘 지내고 계실까? 직장에 당당하게 야동 들고 온 놈은 다리 잘 피고 살고 있을까? 의뢰인 분이 지금 다 털어내고 행복하면 좋겠다(가해자놈은 알 바 없다).

 유퀴즈나, 그알 유튜브에서 분석가가 야동이나 전단지 들고 자신의 배우자라면서 분석을 요청하는 사례가 있다던데, 새삼 느꼈다. 물론 이 에피소드는 27번째 에피소드, '요괴의 그림을 보지 마세요'에 더 상세히 나온다.

 

No.020 너는 이게 재미있냐?

 

 가장 가볍게 흘러 넘겼고, 가장 뇌리에 남은 에피소드이다. 분석가는 학창 시절, 우연찮게 만난 야구부 학생의 말을 떠올린다. "너희들은 이게 재미있냐? 야구가 재밌어?" 그리고 분석가는 몇 십년이 지난 후에야 답한다. "네가 아직 야구의 재미를 맛보지 않아서 그래." 

 참 이상하다니까. 이런 개요와 이런 결말의 이야기는 자주 들은 거 같다. 어떤 것을 재미없어 하는 것은, 그 만큼 그 장르에 깊이 발을 디디지 않아서라고. 문득 산책을 하다가 저 문장이 생각났다.  "네가 아직 야구의 재미를 맛보지 않아서 그래."  나는 내 전공의 재미를 맛보지 않아서 지금 방황하고 있는 걸까?

 

No.041 면접 후기

 

 이제껏 보지 못한 면접 후기이다. 다른 에피소드에도 잘 드러나지만, 특히 이 에피소드가 분석가의 성격을 제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면접관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의견에 반박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다 보고 나는

 

 맨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고 가본 적도 없는 연구소에서 청소기를 돌리는 상상을 했다. 분명 누군가는 분석가님 밑에서 배우겠다며 찾아오기도 했겠지? 그러나 이 에피소드의 결말을 보면 통과한 후임은 아직 없어 보인다. 대학원도 찾아보고, 앞으로의 미래도 다시 생각해봤다. 책을 보면서 질문 거리를 정리했다. 오는 토요일에, 강연에서라도 질문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러다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내 일을 회피하려고 이 일을 택하려 하는 건가? 그리고 20챕터가 떠올랐다. "네가 아직 야구의 재미를 맛보지 않아서 그래." 

 아직 법영상 분석이라는 분야에 욕심이 남아있다. 기회가 있으면 일단 잡아보려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전공부터 제대로 맛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나의 최고점을 찍고, 그 후에 다시 움직여 봐야겠다고. 내가 만족한 만큼까지만 해봐야겠다고. 그래야 미련이라도 없지 않을까? 단순한 투정일 지 변곡점을 맞기 위한 준비일 지 아직은 모를 일이다.

 

 

Fin.